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문단 편집) === 황제 즉위 전 === 클라우디우스 2세라고도 불리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할 당시, 56살이었다고 하며 동생은 [[퀸틸루스]]가 있었고 동생에겐 자녀가 두명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정보 외에는 그가 정확히 어느 곳에서 태어났고 어떤 가문 출신이며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불확실해 알 수 없다. 익명의 저자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일가의 명령으로 저술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그가 플라비우스 일족의 일원으로 4세기 [[콘스탄티우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와 친척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오늘날 황제들의 일생을 다룬 책 중 가장 오류가 많고, 버전도 여러 개가 발견될 정도로 주장도 중구난방이다. 더욱이 그 내용도 죄다 아첨과 날조 등이 많고, 필사 과정에서 여기저기 조작한 흔적이 넘쳐 문제가 많다. 당장 이 책은 그 정당성까지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진영과 콘스탄티누스 일가 진영 사이에서 서로 주장이 대비되는 모양새도 띠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가 콘스탄티우스 1세의 친척이라는 주장은 아예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이 황제의 삶에 대해 살펴볼 때 역사가들은 비문, 동전 외에는 보통 [[조시무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등 로마사 사가들의 기록을 참고한다.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을 로마인들에게 불리는 이름으로 사용해, 사람들에게 클라우디우스 2세 또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불린다. 따라서 얼핏보면 그 유명한 클라우디우스 가문 후손 또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분파 중 어느 한 가문의 클리엔테스 후손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2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먼 후손도 아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손들과 그 가문(클라우디우스 네로 가,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은 [[네로]] 시대 내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죄다 반역죄 같은 죄를 뒤집어쓰고 살해당했다. 그래서 네로 생전 이미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는 네로 외에는 여성황족 일가와 사돈 가문들까지 거진 혈통이 끊긴 상태였다.], 각 속주에 수 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오래된 역사와 공화정 이래 최고 명문 중 하나가 된 까닭에 도시 하나가 클리엔테스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분파 중 하나인 네로 가문의 클리엔테스는 카이사르 암살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기록에서 나오듯 스파르타 시 전체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부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다. 또 로마 제정시대 원로원 의원 명부와 집정관 역임자 기록을 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시민권과 씨족명을 하사받아 개인이름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것을 붙인 그리스, 소아시아 출신 로마인들도 많이 보이며, 이 가문의 성씨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신참자 귀족들도 꽤 보인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로마시민권과 성씨를 하사받은 클리엔테스의 후손이 아니다. 앞 세대 황제 중 [[푸피에누스]]처럼 모계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태생으로 모계가문을 이어받은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귀족도 절대 아니다[* 즉위 전 풀네임에 아예 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변형 성씨인 클로디우스를 성에 붙여 사용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의 피를 이어받은 남성들의 전통에 따라 이 가문에서 많이 쓰는 마르쿠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푸피에누스가 대장장이 아들로 미천한 가문 태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연구와 2000년대에 이탈리아 각지에서 나온 유적, 유물 등을 통해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의 아피우스 딸 클로디아 풀크라이고 푸피에누스의 아버지 역시 에트루리아계 세습귀족인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가 출신의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인 것이 밝혀졌다.]. 즉, 그는 로마 제국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나 아피 클라우디우스부터 시작된 클라우디우스 일족 내 분파가문들의 후손도 아니고, 이들과 그의 조상이 어떤 클리엔텔라 관계도 아닌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클라우디우스라는 인칭 이름이 성씨(姓氏)가 아니고 성씨 뒤에 붙은 분파성씨 혹은 지파성씨로 번안되는 코그노멘인 사람이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즉위 전 본명이자 정식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다. 사실 공화정 말부터 로마인들은 건국 당시처럼 이름을 짓는 관습에서 벗어나거나, 각자 성향에 따라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귀족이나 최상류층의 경우에는 자신들과 연관된 조상들 이름을 양가에서 각각 따서 지어주긴 했는데, 속주민들은 본인이나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이런 전통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그래서 제정이 안정되고 300여년이 훨씬 지난 3세기 클라우디우스 2세가 활동하던 무렵에는 로마화한 [[야만족]]들이나 제국 각지의 자유민들은 과거 [[카이사르]] 등 해당 가문 수장에게 씨족명을 하사받은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로마의 명문가 이름들인 [[리키니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같은 씨족명을 성씨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당시에는 사라진 왕조 중 [[기사계급]] 가문인 플라비우스 등도 성씨나 개인 이름으로 썼기 때문에, 성 만으로 당사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로마제국 시대 스틸리코의 일대기를 저술한 이집트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처럼 로마 귀족들의 성씨나 해당 가문 남성이나 여성들이 사용한 이름을 변형해[* 사실 -anus라고 붙이는 경우는 양자입적된 남성이 친가 성씨에 붙여 사용해 입적된 뒤 바꾼 이름 뒤에 사용한 이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외할머니의 남동생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본래 성씨인 옥타비우스를 옥타비아누스로 바꾸고 입양되면서 취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붙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풀네임을 취했다.] 자신의 성씨나 이름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고, 원로원 의원 중 속주출신 신참자나 제정 중기 이후 등장한 귀족가문들 중에는 자신의 성씨나 이름에 명문가 이름을 조합해 이를 개인이름과 성씨로 합쳐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클리엔테스 후손이어도 진짜 로마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카이사르에게 율리우스 성씨를 하사받은 갈리아 족장 후손 중 이런 경우가 제정 시대에 많았다고 한다.]. 또 이 시기 성공한 속주 태생 로마인들은 클리엔테스 후손이 아니어도 자신의 풀네임에 있는 유명 성씨를 이유로 본인이 알고 보면 이 가문 후손이라는 말도 했다. 다시 말해, 이 당시 속주출신이나 로마화한 야만족 후손 로마인들 중 명문가 이름을 사용한 이들은 공화정 초기나 왕정 시대에 존재했다가 제정 초기에 사라진 가문 이름이나 있어도 후손이 거의 없는 집안 이름을 성씨나 개인이름으로 많이 사용했고, 일부는 성공 후 아예 족보를 만들어 자신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235년 멸문한 [[세베루스 왕조]] 시대 전부터 나온 현상이었는데,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황제 본인이 세간에 레반트인, 시리아인이라고 자꾸 비난받자[* 이 황제의 경우에는 애당초 세베루스 왕조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즉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이모 [[율리아 마이사]]의 둘째 딸 [[율리아 마마이아]]가 낳은 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창건자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오래된 메텔루스 집안 후손이라며 아예 족보까지 만들게 했다. 또 3세기때 황제로 즉위한 황제 중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처럼 출신가문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에게 로마시민권을 받은 클리엔테스 후손도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모친이 [[그라쿠스 형제]]의 셈프로니우스 가문 태생이라는 이유로 풀네임 안에 이 이름이 있다는 것을 비문 안에 넣고 내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3세기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역시 여러 근거를 이유로, 로마화한 야만족의 후손 내지 그의 출신지인 오늘날 세르비아에서 살던 농민의 후손이라고 확언한다. 당장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 속주민들이 대부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볼 때, 클라우디우스 2세의 가족들이 최소 본인 부모 대에 시민권을 받은 속주 자유민 태생이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태어난 곳은,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이나 모이시아의 나이수스 중 하나로 짐작된다. 그런데 후자 주장의 경우에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그와 콘스탄티우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 부자와 연결짓기 위해 나이수스를 공통점으로 찾아 어거지로 붙였다는 가설도 있고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아 논란이 있다. 한편 4세기 말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카이사르의 전형>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라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전형>이라는 저서는 위서로 까이고 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보다 형편없는 위서 중 위서로 무시받고 있어, 역사학계는 이 기록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아예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확실히 없다. 다만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여 성실과 용기를 보여줘 [[데키우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고대기록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로마화된 야만족이었고 하층민 출신으로 일찍이 군생활을 했고 일찍부터 힘이 장사였고 저절로 내뿜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가 현역 군인인 시절의 전설에 따르면, 타고난 힘과 운동능력은 앞세대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버금갔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힘이 대단했는지, 주먹질로 말을 때려 이빨을 다 날렸을 정도였다고. 다른 기록에서도 이야기는 같은데,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힘이 장사라서 250년 레슬링 선수와 경기 중 상대가 자신의 성기를 움켜 잡으며 반칙을 하자, 그 즉시 상대를 제압하면서 그 선수의 치아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원로원과 민중은 클라우디우스를 장군감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발레리아누스]]가 그를 연대장급 장교로 내버려둔 것에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승진시켜 일리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 모에시아, 다키아, 판노니아, 달마티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했고, 그 뒤에는 이집트 사령관과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그의 명성을 질투하고 그가 황제가 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 등 당대 역사가들의 사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시대에도 중용되어 갈리에누스가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